스위스 루체른, 비오는 일요일 짧은 여행 Switzerland Luzern

내내 제멋재로였던 날씨는 스위스를 떠나는 날까지 말썽이었다. 아침부터 굵은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고 비는 브리엔츠Brienz를 출발해 루체른Luzern에 도착할 때까지 내내 쏟아져내렸다. 우리는 취리히 공항으로 가는 길에 루체른에 들러 2시간 정도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슈퍼세이브 티켓이 굉장히 저렴해서 추가 요금을 내도 괜찮을 것 같았다. 

전날 밤 정신없이 짐을 싸다가 슈퍼세이브 티켓을 예매를 깜박해버렸다. 아무 생각 없이 기차에 올라탄 우리는 무임승차를 한 꼴이었다. 티켓 결제를 하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을 때는 이미 기차가 출발하고 검표원이 객차 안으로 들어온 뒤였다. 방법이 없었다. 무임승차를 할 수는 없으니 티켓값과 약간의 벌금을 지불하는 수 밖에.

루체른 역 코인락커에 캐리어를 넣어두고 역 밖으로 나왔다. 어떤 이들에게는 가장 인상적이었던 도시로 손꼽히는 루체른이지만 시작부터 꼬이고 나니 곱게 보이지 않았다. 날씨도 별로였고 하필 일요일이라 상점도 다 문을 닫았다. 모든 일에는 적절한 타이밍이 있는 법인데, 우리가 고른 타이밍은 어쩌면 최악이었는 지도 모르겠다. 회색 구름이 하늘을 뒤덮은 하늘은 피어발트슈테터 호수Vierwaldstattersee의 영롱한 빛깔을 모두 앗아갔고 카펠교Kapellbrücke에 흐르는 낭만은 빗방울에 모두 씻겨 내려가버린 듯 했다. 

1333년 완공된 카펠교는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다리다. 일자로 곧게 뻗어있을 뿐인 투박한 모습이지만 루체른의 평화로운 분위기에 어울리는 은은한 우아함이 있다. 카펠교를 가까이서 보면 거뭇거뭇한데, 대화재의 흔적이다. 1993년 루체른은 큰 화재에 휩싸였다. 카펠교역시 화마를 피할 수는 없어서 절반 가까이 소실되었다. 정부에서 적극적으로 복구를 지원한 결과 1년 만에 복원되었지만 화재의 흔적을 모두 지우지는 않았다. 

가펠교 천장에는 베크만이 그린 판화가 전시되어 있다. 대화재 때 소실된 작품의 자리는 비워져있다.

카펠교 지붕 안쪽에는 삼각형 모양의 그림이 종종 걸려있는데, 스위스 역사상 중요한 사건과 루체른 수호성인인 레오데가르와 마우리티우스의 생애를 형상화 한 122점의 판화 중 화재 당시 손실되지 않은 것들이다. 약간의 손상만 입은 작품은 그을린 상태로 걸려 있고 아예 타버린 것은 원래 있던 자리를 비워 두었다고. 카펠교를 따라 걷다보면 다리 가운데 우뚝 솟은 저수탑Wasserturm에 도착한다. 과거 감옥, 고문실로 쓰이다가 현재는 기념품 가게로 이용되고 있는데 눈길을 끄는 기념품은 없다. 

열차 출발 시간까지 시간이 1시간 넘게 남아서 빈사의 사자상Löwendenkmal까지 보기로 했다. 카펠교에서 지도를 따라 15분 정도 걸으니 중국인 단체 관광객이 나타났다. 굳이 물어보지 않아도 그들이 가는 곳에 빈사의 사자상이 있을 것 같은 느낌. 예상은 정확했다. 그들을 따라 간 곳에 사자상이 있었다.

가이드북 사진만 봤을 때는 조각이 아주 작을거라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크고 정교했다. 

빈사의 사자상은 프랑스혁명 당시 루이 16세가 몸을 피할 수 있도록 최후의 순간까지 궁을 지키다가 전사한 786명의 스위스 용병을 기리기 위해 만든 것이다. 과거 스위스는 강대국 틈새의 척박한 땅에 자리한 빈국이었다. 먹고살기 위해 된 것이 용병이지만 쉬운 마음으로 한 것은 아니었다. 단 한 번이라도 신뢰를 잃으면 자식 세대는 영원히 용병을 할 수 없을거라 믿었기에 맡은 일은 죽음을 무릅쓰고라도 완수해내곤 했다. 결국 화살을 맞고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사자는 충성스럽고 용맹한 스위스 용병의 모습이자 사랑하는 이를 위해 희생을 감수한 누군가의 가족의 모습인 셈이다.

빈사의 사자상을 보고 다시 루체른 중앙역으로 돌아오는 길, Bachmann 매장에 들렀다. 루체른 관광안내 무료책자 안에는 기념품 교환 쿠폰이 몇 개 들어있는데 그 중 하나가 이곳의 초콜렛이다. 쿠폰을 잘라 매장 직원에게 주면 초콜렛 한 봉지로 교환해주는데 양이 꽤 많았다. 봉지를 뜯어 초콜렛을 한 알 입에 넣으니 부드럽게 사르르 녹았다. 비오는 일요일의 루체른은 무색무미였지만 이곳에서 맛본 초콜렛만큼은 달콤하고 향기로웠다. 언젠가 다시 루체른에 올 일이 생긴다면, 그 때는 이 초콜렛처럼 달달하고 낭만적인 루체른을 맛볼 수 있을까?


안녕채영

Seoul / South Korea Travel blogger & Wri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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