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엔 성북동을 걸으면 좋겠어요.

가을을 조금 더 천천히 즐기고 싶다면 가을의 고즈넉함을 닮은 성북동을 걸어보자. 이제껏 알아채지 못했던 소박한 가을의 발자취를 발견할지도 모른다. 

| 길상사, 이루지 못한 사랑 이야기가 깃든 사찰
평생을 살아도 잎과 꽃이 서로를 볼 수 없는 가여운 운명을 타고난 꽃이 있다. 사는 내내 서로를 그리워한다고 해서 사람들은 꽃에 ‘상사화(相思花)’라는 이름을 붙였다. 꽃말도 ‘이룰 수 없는 사랑’이다. 더위의 기세가 한풀 꺾이면 길상사 곳곳에 상사화가 피어난다. 상사화가 지고 난 뒤에는 상사화를 똑 닮은 꽃무릇이 그 빈자리를 대신한다. 길상사에는 상사화처럼 가여운 두 사람의 사연이 깃들어 있다. 길상사 마당에 때마다 피어나는 상사화와 꽃무릇도 이들의 애틋한 인연을 아는 스님들이 심었다. 


길상사는 사찰이 되기 전 대원각이라는 유명한 요정이었다. 이곳의 주인은 김영한, 백석의 연인 ‘자야’로 알려진 여인이었다. 기생이었던 그녀는 22살이 되던 해 백석을 만나게 된다. 대번에 사랑에 빠진 그들이지만 기생과의 만남을 반대하는 부모님을 거스를 수 없었던 백석은 다른 여인과 결혼을 하게 된다. 백석은 자야에게 만주로 함께 도망갈 것을 제안하지만 자야는 백석의 장래를 생각해 거절했고, 6·25 전쟁이 나면서 북에 남은 백석과 남쪽의 자야는 꽃과 잎이 만나지 못하는 상사화처럼 평생 해후하지 못했다. 


대원각을 통해 자야는 부귀영화를 거머쥐었지만, 사랑을 잃은 그녀에게는 그 모든 것이 무상할 뿐이었다. 우연히 접한 법정 스님의 『무소유』에 감화된 자야는 “내 모든 재산이 백석의 시 한 줄만 못하다”며 1995년 대원각을 시주했고 밀실 정치의 상징이던 요정은 낭만적인 사연이 담긴 사찰로 다시 태어났다. 백석과 자야를 닮은 꽃무릇이 길상사를 가득 채우는 가을, 짧지만 진했던 그들의 만남을 떠올리며 여름과 겨울 사이에 찾아온 짧은 계절을 만끽해보길. 


| 북정마을, 서울 하늘 아래 마지막 달동네

성북동에는 ‘서울의 마지막 달동네’ 북정마을이 있다. 조선 시대 궁중에 바치는 메주 쑤는 일이 이 마을에 주어지면서 온 마을 사람들이 ‘북적북적’ 거려서 ‘북정마을’이라고 불렸단다. 마을에는 여느 달동네가 그렇듯 가파른 언덕에 낮은 지붕을 얹은 집들이 빼곡하게 모여 있다. 

좁고 가파른 언덕을 오르다 보면 숨이 깔딱깔딱 넘어갈 듯하지만 가쁜 숨을 고르고 주변을 둘러보면 마을을 둘러싸고 시원스럽게 펼쳐져있는 풍경에 탄성이 터져 나온다. 서울 성곽을 끼고 있는 북정마을은 한양도성 순성길 중 ‘백악구간’에 해당한다. 성벽과 어우러진 가을 단풍이 절경이라 한번쯤 걸어볼 만 하다. 


| 만해 한용운 심우장, 그 꼴이 보기 싫어 등을 돌렸네

북정마을에는 독립운동가이자 ‘님의 침묵’으로 유명한 만해 한용운 선생의 집 ‘심우장(尋牛莊)’이 있다. 심우(尋牛)는 불교에서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는 과정을 잃어버린 소를 찾는 것에 비유한데서 유래했으며, ‘자기의 본성인 소를 찾는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심우장은 한옥에서는 흔치 않은 북향집이다. 남향으로 지으면 조선총독부를 마주하기에 아예 집의 방향을 틀어버린 것이다. 


그늘진 북향집이지만 마당에 가을볕이 들어 쓸쓸하지 않다. 한용운 선생이 직접 심었다는 마당의 향나무는 그의 기품을 닮아 유난히 높고 곧게 뻗어있고, 서재로 사용하던 온돌에는 연구 논문집, 옥중 공판기록, 친필유묵이 원본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가을 향기 끝없이 옷에 감기네(秋香無數撲禪衣)’. 벽에 걸린 글귀에 시선이 머문다면, 잠시 만해의 툇마루에 앉아 시를 읊으며 사색을 즐겨보는 것은 어떨까.  

성북동 여행정보

찾아가는 길=
· 길상사: 서울특별시 성북구 선잠로5길 68. 서울 지하철 4호선 한성대입구역 앞 정류장에서 성북02번 버스로 20분 소요.
· 북정마을= 4호선 한성대입구역 앞 정류장에서 성북03번 버스 종점 하차, 마을에서 심우장까지 도보 5분

◈맛집·카페=
· 선동보리밥(02-743-2096) 보리밥과 영양돌솥밥이 맛있는 한식집. 
· 수연산방(02-764-1736) 상허 이태준 고택을 개조한 전통 찻집.

◈주변 볼거리=
· 최순우 옛집: 해곡 최순우 선생의 옛집. 사진 앨범과 유품 전시관을 둘러볼 수 있으며, 상설 전시도 열린다. 관람 시간 오전 10시~오후 4시, 매주 일·월 휴관


안녕채영

Seoul / South Korea Travel blogger & Wri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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