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울아 거울아, 세상에서 구채구가 제일 예쁘니?

거울아 거울아, 세상에서 구채구가 제일 예쁘니? 


하필이면 첫눈이 내렸다. 매섭게 흩날리는 눈발에 구황공항으로 향하는 비행기는 모조리 결항했다. 꼼짝없이 공항에 발이 묶인 이들은 닫힌 게이트 앞에서 기약없는 기다림을 시작했다. 여행에 대해 재잘거리며 이야기를 나누고, 가벼운 빙고게임으로 무료함을 달래는 것도 잠시, 이내 지독한 고요함이 밀려왔다. 얼핏 들리는 소리로는 주자이거우(구채구)에 15cm의 눈이 내렸다고 한다. 기다림은 어느덧 6시간을 넘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항공편을 포기하고 버스를 선택했다. 8시간의 기다림 끝에 내린 결단이었다.


 

| 산을 빼곡히 채운 나무에 살포시 앉은 눈꽃이 잔잔한 호수에 비치고, 푸른 하늘을 머금은 물빛은 하늘보다도 푸르다.

경해(鏡海)는 한치의 다름 없이 모든 것을 비추어내는 '거울바다'다.

 

그 날, 첫눈이 내렸네 

쓰촨성의 성도인 청두에서 주자이거우(구채구)로 가는 방법은 두 가지다. 첫 번째는 청두 공항에서 구황공황까지 운행하는 항공편을 이용해 약 1시간의 비행 후 1시간 30분여를 차로 이동하는 방법. 두 번째는 약 8시간 정도 구불구불한 도로를 달리는 버스를 이용하는 방법. 

8시간 동안 쓰촨성을 가로지르며 달리는 것은 상상하는 것만큼 힘든 여정이다. 높이 솟은 산과 강줄기, 곳곳에 자리한 작은 마을을 잇는 도로는 좁고 험하다. 중앙선이 가르고 있는 차선은 2개지만 이곳은 언제나 일방통행이다. 물론 상행선과 하행선의 구분 또한 없다. 그저 길이 나있는대로, 가야하는 방향대로 눈치껏 달려야 한다. 가로등 하나 없는 캄캄한 어둠 속을 달리며 아슬아슬 곡예를 펼칠때마다 서늘해지는 가슴을 쓸어내려야했지만, 다행히 버스기사의 운전기술은 가히 신의 경지라 할 만큼 탄성을 자아냈다.

자정 무렵 구황공황을 지났다. 새벽 6시, 주자이거우(구채구)에 가기 위해 숙소를 나온지 약 18시간만이다. 공항은 굳게 닫혀있었다. 하루 종일 내린 눈 때문에 단 한대의 비행기도 움직이지 못했단다. 힘든 여정이었지만 버스를 선택한 건 현명한 선택이었다. 지루한 기다림, 대륙의 드라이브를 견뎌냈으니 이제 첫눈이 선사한 숨 막히는 설경을 감상할 차례다.

 

 |겨울의 특권은 설경만이 아니다. 작은 천지(天池)인 중계절해(中季节海)를 감상하는 행운을 누릴 수도 있다.
중계절해는 여름이되면 물이 거의 마르고 풀이 자라나 목초지로 변하기 때문에 겨울에만 볼 수 있는 호수다.

 

사랑하는 여인에게 바친 거울 하나

산신 달과(達戈)는 아리따운 여신 색모(色嫫)와 사랑에 빠졌다. 사랑에 빠진 이들이라면 누구나 그렇듯 달과는 색모에게 사랑의 정표를 주었다. 바람과 달빛으로 만든 거울은 보석처럼 빛났고 둘의 사랑은 더욱 깊어갔으나, 이를 시기한 마귀의 장난으로 색모는 그 거울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산산조각난 거울의 파편은 이곳 골짜리 곳곳에 떨어져 108개의 호수가 됐다. 해발 4,000m의 깊은 산 속에 숨어있던 거울 조각이 세상에 나온 것은 1975년 한 벌목공이 우연히 이 곳에 발을 디디면서였다. 협곡을 따라 알파벳 Y자 형태로 이어진 이곳의 호수들은 전설 그대로 맑고 투명했다. 신이 실수로 떨어뜨린 거울조각이요, 누구와도 나누고 싶지 않은 비취빛 영롱한 목걸이를 발견한 것이다.

많은 중국인들이 가장 가보고 싶은 여행지로 꼽는 비경인 주자이거우는 세계적으로도 그 아름다움을 인정받아 1992년 유네스코세계자연유산으로 등록되었다. 1997년에는 세계 생물권 보호구로도 지정되었다. 주자이거우가 가장 아름다운 시기인 10월 말에서 11월 초는 그 화려함이 이루말할 수 없다. 형형색색으로 물든 단풍이 에메랄드빛 호수와 어우러져 주자이거우는 세상에 있을법한 모든 빛깔로 가득찬다. 그 화려함을 감상할 수 없었던 것은 아쉬운 일이지만 눈꽃으로 뒤덮힌 겨울의 주자이거우는 그 나름대로의 매력을 뽐내고 있었다. 주자이거우를 휘감은 서늘한 푸른빛은 오히려 겨울 여행자만이 담아갈 수 있는 특권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 색모여신이 세수를 하며 씻겨나간 연지 곤지가 흘러들어 오색 빛깔이 되었다는 오채지(五彩池)

장족의 눈에도 바다라기엔 너무 작아보였는지 이름에 유일하게 池(연못지)가 붙었다.

세상의 모든 푸른빛을 담고 있지만 그 중에서도 비취빛은 빙하 녹은 물에서만 난다니 조금 더 특별하다.

 

바다를 모르지만 바다를 보았네

성수기에는 400여 대의 셔틀버스가 주자이거우의 3개 계곡 을 순환한다. 입구에서 출발한 버스는 첫 번째 계곡인 수정구(樹正溝)를 거쳐 15분쯤 달린 뒤 낙일랑폭포가 있는 갈림길에 도착한다. 왼쪽은 주자이거우에서 가장 큰 호수인 장해(長海)와 가장 아름다운 색채의 호수로 유명한 오채지(五彩池)가 있는 측사와구(則渣漥溝), 오른쪽은 전죽해(箭竹海)와 오화해(五花海), 진주탄폭포와 경해(鏡海)가 있는 일측구(日則溝)다. 타고있는 버스의 행선지를 확인하고 방향이 맞지 않으면 내려서 환승할 수 있다. 

 우측 코스인 일측구를 올라 전죽해(箭竹海)에 도착했다. 9세기경 당나라군을 피해 주자이거우에 숨어들어 둥지를 틀고 살던 장족은 산 아래 세상에 '바다'가 있다는 것을 듣고선 넓게 펼쳐진 호수에 '海바다 해'를 붙였다. 대나무의 일종인 전죽이 호수 아래 바닥에 넓게 자라고 있던 이곳엔 '전죽해'라는 이름이 붙었다. 평생 바다를 보기 힘들었던 산중인의 상상력이 깊은 골짜기에 수많은 바다를 만들어낸 셈이다. 전죽해 주변을 대나무가 에워싼 모습이 익숙하다. 역시나 중국 영화 <영웅>의 무대였단다. 장만옥의 시신을 두고 주인공 이연걸과 양조위가 결투를 벌이는 장면은 전죽해의 아름다움을 200% 표현해냈다고 하니 관심이 있다면 한번쯤 볼 만 하겠다.

 판다의 고향 쓰촨성답게 판다의 이름을 딴 호수도 있다. 판다가 물을 마시러 내려온다 하여 판다해(雄猫海)라는 이름이 붙었단다. 안타깝게도 최근에는 관광객이 늘고 판다의 개체수가 줄면서 판다의 모습을 보는 것이 쉽지 않아졌다고 한다. 하지만, 이 일대에는 여전히 판다가 살고 있다고 한다. 저 멀리 대나무 잎사귀가 서걱거린다면 혹 판다의 식사시간이 아닐까 잠시 상상의 나래를 펼쳐보자. 판다해의 고요하고 아늑한 분위기가 기념사진을 찍기에 안성맞춤인지 이곳에는 장족의 민속의상을 입고 사진을 찍을 수 있는 상점들이 많다. 신혼부부인 듯 다정하게 사진을 찍는 남녀를 보니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기념촬영을 유독 좋아하는 나지만 이 순간만큼은 저 신혼부부에게 명당을 양보해야겠다.

 


| 오화해에 잠긴 나무는 썩지 않는다. 오히려 그 위에서 수초가 자라나기도 한다.

300만 년 전 녹은 빙하가 만들어낸 마법이다.

 

꿰지 않아도 보배, 진주가 내리는 폭포
 

정오를 지나며 하늘이 맑아진다. 다정한 햇살에 소복히 쌓였던 눈도 사르르 녹아내린다. 눈 폭탄을 뒤집어 쓴 사람에게야 햇살이 얄밉겠지만 오전 내내 잔뜩 꽁꽁 얼었던 몸이 녹으니 햇살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다. 머리 위에 올랐던 태양이 살짝 더 기울어지더니 눈 앞에 오색 꽃밭이 펼쳐진다. 오화해(五花海). 다섯가지 꽃의 바다라는 지명 그대로 이곳은 맑고 화려하다. 작은 파동에도 흩어져 사라질 것만 같은 투명한 호수엔 구름이 차오르고 꽃이 피어난다. 활짝 핀 장미처럼 농염한 여인의 자태. 혹은 어린 소년의 마음을 한번쯤 빼앗았을 법한 연상의 여인이 떠오르는 곳. 이 물빛을 오롯이 즐기기엔 시리도록 차가운 겨울, 오늘처럼 눈 내린 겨울이 좋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홀린듯 걷다보니 얼굴에 진주가 내린다. 진주탄(珍珠灘)을 흐르는 물이 암반을 살짝 덮은 이끼에 부딪혀 방울방울 튀어올라 알알이 흩어지고 있었다. 흩어진 물방울에 햇살이 드리우니 숨겨왔던 영롱한 빛이 뿜어져 나온다. 물방울이 향하는 곳은 깎아지른 절벽이다. 폭이 200m에 달하는 진주탄폭포(珍珠滩瀑布) 아래에 서 있자니 물이 빚은 진주가 쉴 새 없이 쏟아져 내리고, 알알이 반사되는 진주빛에 눈이 부시다. 

주자이거우에 뿌려진 색모여신의 거울조각은 너무나도 영롱하다. 반짝이는 거울조각을 하나쯤 주워 주머니에 넣어 간직하고 싶을만큼 탐이난다. 눈에 담고 가슴에 새겨도 성이 차지 않는다. 색모여신을 질투한 마귀의 심정이 이런 것이었을까? 이런 나의 마음을 알아차렸는지 경해(鏡海)는 주자이거우의 구석구석을 그대로 비춰낸다. 여신의 거울 조각에 담겨있는 아름다움을 조금이라도 나누어주겠다는 듯이.

 

| 수정구의 수정채(樹正寨)는 주자이거우에서 관광객에게 개방된 3개의 마을 중 하나다. 

주자이거우에는 모두 9개의 장족 마을이 있다.


| 즉석에서 뿔을 갈아 만드는 참빗, 티벳풍의 수공예품을 비교적 저렴한 가격에 살 수 있다.

 

 

 

안녕채영

Seoul / South Korea Travel blogger & Wri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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