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 당시 피난민의 삶이 녹아있는 현장이자 영화 <인정사정 볼 것 없다>의 촬영지인 40계단(▶부산 40계단 문화관광테마거리, 알고 가야 더 좋은 그곳) 맨 꼭대기에 올라서서 왼편을 바라보면 눈에 띄는 벽화가 있다. 벽화에는 책과 연필, 그리고 '인·쇄·골'이라는 글자가 선명하다. 동광인쇄골목 벽화거리에 왔다는 뜻이다.
중앙~동광동에 걸친 인쇄골목은 1960년대 초 신우정판과 동양정판 그리고 대청동 서라벌호텔 뒤편의 자문정판이 들어서면서 시작됐다. 이들을 필두로 인쇄 관련 업체가 하나둘씩 자리 잡기 시작했고, 1970년대 초부터 국제시장 대청동 입구와 구 시청 주변에 있던 업소들이 이전해오면서 비로소 인쇄 관련 업종 200여개 소가 한 곳에 모여있는 전국 최대의 인쇄 골목이 완성된 것. 90년대 이후 매체 및 미디어의 발달로 인해 쇠락의 길을 걷고 있긴 하지만 전국에서 손꼽히는 인쇄골목이라는 것만큼은 변함없다.
이곳에 벽화가 그려진 것은 2012년. 제2회 거리 갤러리 미술제가 진행된 것이 계기였다. 인쇄골목을 아우르는 벽화거리는 동광동 인쇄골목에서 복병산길, 대청동 기상관측소까지 이어진다. 벽화거리는 천(天)·지(紙)·인(人)을 주제로, 부산기상관측소 주변의 하늘(天) 거리, 인쇄골목을 중심으로 한 종이(紙) 거리, 40계단을 중심으로 한 사람(人) 거리로 조성되어 있다. 하나의 길을 따라 작품이 내내 이어지는 것은 아니고, 거미줄처럼 얽혀있는 골목 중간중간 볼만한 그림과 조형물이 설치되어 있는 식이다.
폐가 철문과 담장을 책과 책장으로 묘사한 <꿈꾸는 책장>
40계단 옆의 좁은 골목은 종이(紙) 거리에 해당한다. 낡은 건물 사이로 난 길은 생각보다 짧고 벽화 또한 그리 많지는 않지만, 옛 부산의 정취를 느끼기엔 손색이 없다. 벽화를 구경하기에 가장 좋은 시간은 대부분의 인쇄소가 쉬는 일요일 아침이다. 인쇄소의 셔터가 내려진 뒤에는 숨겨져 있던 그림까지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셔터 위에 그려진 그림은 벽에 그려진 것보다 더 유쾌하다. 인쇄골목의 마이다스라는 이름을 내걸고 '금박맨', '은박우먼', '저버보이'를 외치는 그림처럼 말이다.
<동광동 고바우>는 2012년 진행된 제2회 거리 갤러리 미술제에서 최우수상을 받았다
인쇄골목에서 보수동 쪽으로 걷다 보면 나오는 '동광동 고바우'는 만화책을 찢어서 벽에 붙여놓은 것 마냥 재미있다. 1960~90년대 김성환 화백의 4컷짜리 시사만화 '고바우 영감'을 소재로 한 것인데, 세대 간의 소통과 인쇄골목의 역사성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어 더욱 의미 있는 작품이다. 거대한 크기를 자랑하지만 건물 위쪽에 설치되어 있어서 무심코 지나치기 쉬우니 주의할 것.
■ 동광동 인쇄 골목 벽화 거리
- 주소: 부산광역시 중구 동광동 19-1 일원
- 부산 도시철도 1호선 중앙동 역 13번 출구로 나온 뒤, 40계단 왼편으로 돌아가거나 계단을 오르면 쉽게 찾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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